「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어쩌겠는가? 기적을 믿는 수밖에」

군 입대 후 자대배치를 막 받았을 때 성향조사 같은 것을 하면서 '나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YES/NO)와 비슷한 류의 질문들에 '그렇다'라고 답했다가 원사 행보관님에게 뒤지게 혼난 적이 있다.

 

(최전방에 가야 했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말씀하셨다고 하지만..)

"너 이 새끼 조금만 힘들면 여기서 죽으려고 그러냐? 정신 상태가 빠진 패배자 녀석, 너는 앞으로 관심병사 후보다"

 

다짜고짜 어찌나 나를 몰아세우시던지, 행보관이라는 직책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신병인 나는 (선생님 저에 대해 아세요?)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죽는다 그랬냐, 어떤 사람들은 물리적/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죽고 싶다고 한탄할 수도 있지 않겠냐, 그런 안타까운 심리적 상황과 형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다"라고 정말 발끈하면서 싸운 적이 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중대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조금의 사색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질문들 따위로 누군가가 순한 양인지 아닌지를 이분법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 자체가 참으로 괘씸하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쉽게 '아니요'라고 대답했던 것일까? 정말 '네'라고 대답한 사람이 나 혼자뿐이었던 걸까?  

같은 시기에 근무했던 옆 중대 아저씨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초소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어떤 이상도 쉽게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끝없이 늘어선 철책을 향한 이성의 절규였을까, 

차가운 바닥을 뜨겁게 적셔가는 것은 나만의 작은 공간에 기적이 영원히 새겨져 가길 바란 희망의 눈물이었을까.

최소한 누군가는 그의 마지막 소통의 의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끌릴 때가 있다.

하지만 세상을 바꿀 기적은 쉬이 일어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은 불편한 감정을 한번씩 게워내듯 되새김질을 반복할 뿐 이내 편안함을 되찾는다.

 

다시 생각해 보면 사회적 비극들은 나의 일상과 그렇게 먼 곳에 위치해 있지 않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의 별의별 슬픔과 고됨이 화면을 계속 채우고, 그들과 나라는 존재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만한 요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사연이 과연 내 삶과, 혹은 내가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것과 동떨어져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분명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였을 끊임없는 선택들 속에서 나라고 실수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과연 실수가 있긴 했었을까?

 

내 일이 아니라고 하여 쉬운 말로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라고 오만을 떨 수도, 내 일이 아니라고 하여 가볍게 '이번 생은 빨리 GG 치고, 다음 생을 노리자'라고 웃어넘길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비정상과 정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에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저 내가 운이 좋았음에 감사해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를 전하고, 책임지지 못할 선택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시길 부탁드릴 뿐이다. 

 

 

무엇을 위해 계속되는지 알 수 없는 전쟁 같은 삶, 이 지긋함의 끝은 보이지 않고, 총알 한발 깊은 가슴에 품은 패잔병이 되어서라도 그저 하루하루 견뎌내다 보면 어느샌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 전우들의 함성 소리에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전우들이 있었고, '기적처럼 살아 있어 줘서, 함께 싸울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주옥 같은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리는 요즈음, 억울한 마음과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어쩌겠는가 기적을 믿는 수밖에


사람들은 기적을 바란다. 왜 아니겠는가. 이 삶에서 안식을 얻기가 어려운데, 어딘가 깊은 곳이 상처 입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데,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데, 왜 기적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끔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고, 기적을 기다린다. 어느 날 불현듯 눈앞에서 나타날 기적을 기다린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육신에 영혼의 존엄은 좀처럼 깃들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는 시들고,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도 시들고,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분발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토라지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가짜 존엄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에게도 평화는 없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모든 것이 헛일이 되고, 그 소중한(?) '갑질'도 이제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추모할 수 없다. 갑질을 못 이겨 경비원이 자살해도,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까 봐 그 경비원을 추모할 수 없다. 추모 현수막을 걷어버려라!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왜 이리 잘난, 아니 잘나 보이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지! 잘나 보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오늘도 하염없이 토라져간다. 이제 고요함 속에 자신의 존엄을 길어 올리는 일 대신, 남을 무분별하게 비난하면서 자기 존재의 존엄을 찾으려 드는 사회가 되어 간다.
이 모든 것이 싫어진 사람들이 있다. 어쨌거나 아이를 낳고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라고 정부가 채근하기에, 더 깊이 이 모든 것이 싫어져 버린 사람들이 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을 착취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남에게 폐기를 끼치고 싫고, 남과 아귀 다툼을 하기는 더 싫은 사람들이 있다. 주변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삶을 개선할 방안은 시야에 보이지 않는데, 살아야 할 나날들은 눈앞에 엄연히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기적은 일어난다」, 『중앙일보』, 2023. 4. 25. 26면.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기적은 일어난다 | 중앙일보

나는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가는 건데, 이 세상의 단골은 아닌데, 이 세상 뜨내기손님에 불과한데, 이 세상이 내 구미를 알 리가 없는데, 이 세상은 자꾸 나 보고 주는 대로 먹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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