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을 올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최인호의 <순례자>

'1960~70년대 끊임 없는 도시개발로 인해 서울의 중심에서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서울사람들의 삶을 그려냈다'라고 하는 최인호 작가 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책을 고를 때면 웬만하면 최신 작품순으로 고르게 되는 나쁜 습관을 가졌음에도 이 분의 오래된 소설들은 꼭 한번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읽고 싶은 「순례자」라는 작품은 왜 이렇게 검색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어느 틈엔가, 사람이 살지 않았고 그저 시냇물이나 흐르며, 가까운 국민학교에서 소풍나와 도시락을 까먹던 교외의 수유리도 이제는 버젓이 땅값을 올리고, 하루의 일과인 양 재건체조 하듯이 집값을 올리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별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가득 차버린 모양이었다. 세금을 꼬박 꼬박 내는 신혼 사관학교 일기생들이, 자기들이 이루어놓았던 황량한 벌판의 보금자리가 차츰차츰 비싸진다는 사실이, 김장을 담그고, 구공탄을 사들이는 소꿉장난보다도 더 신나는 것임을 일찌감치 터특한 모양이었는지 그저 벽돌로나 집을 짓고, 인조대리석을 몇 개 붙이고, 변소보다 작은 가스 사형실 같은 목욕탕이 있는 집이면 무조건 '두장' 이었다.

<월간 국토> 22년 12월호에 소개된 최인호의 소설 「순례자」 내용 중  


최인호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어머니는 작은 한옥집의 방에 세를 주어 남매를 키웠다. 작가의 이런 경험은 「순례자」(1969)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 최인호의 식구들은 단칸방에서 지내면서 나머지 방을 세주다가 등록금이 오르면 전셋값을 올려 새 세입자를 구했다고 한다. 이 일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세를 주다가 등록금이나 결혼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집을 팔아 충당한다. 집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는 것은 물론이고, 수도 등의 시설이 열악해지며, 집의 위치는 시내와 더욱 멀어진다. 모자는 신촌의 집을 팔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러 강북 수유리까지 가지만 수유리의 땅값이 올라 교외라 생각했던 수유리에도 집을 마련할 수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이혜정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님의 해설 

나는 부동산 시장에서 흔히 말하는 투기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투자라는 단어와 어떤 면에서 차이점을 갖는지 잘 납득하기 어렵고, 점점 높아지는 자산의 가치는 내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법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미리 잘 올라탔을 뿐이라면, 혹은 거부할 수 없는 공간의 뒤틀림에 휘말렸을 뿐이라면 무엇을 탓할 수 있을까?

 

똑같은 구조의 방 한 칸이 갖는 가치도 지역에 따라서 각양각색, 시기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다. 본인의 의도하고는 크게 상관없이 큰 흐름이 만들어지고 이놈의 시장은 쉴 새 없이 변화한다. 

 

월세 50만 원짜리였던 것이 갑자기 80만 원짜리가 되면 으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기존 세입자들한테 딴지 걸어 내쫓기 바쁜 놈들도 태반이다. 지역에 그럴싸한 호재가 있으면 세상이 모두 자기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에서 거주를 위한 공간으로서 주택의 가치는 부자들만을 위한 특정 지역의 고급 주택에서나 의미가 있고, 어디에나 널브러져 있는 모두 똑같이 생겨먹은 아파트에서 그들의 등급을 나누는 요소는 몇 가지로 정형화되어 있으며 다가구/다세대로 가면 입지를 제외하고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주거용 부동산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가치보다 지역적인 분위기에 너무 쉽게 편승하려는 경향성이 있다. 물론 내가 가만히 있어도 가치가 올랐다면, 당연한 권리는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것이 맞다. 그래야 가격이 내릴 때 흘리는 눈물이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렇다 보니 어떻게 살기 좋은 건물을 지을까?라는 고민보다는 어떻게 지역적인 가격을 올릴까? 에 사고가 함몰되어 있는 것 같다. 

 

나대지가 아닌 이상 부동산의 자체의 가치는 사실상 일정 범위로 제한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을 끊임없이 갈궈서 내 주변에 호재를 끌어다 놓으라고 명령하고, 옆 동네보다는 우리가 더 나은 이유를 계속해서 강조하며 급 나누기를 시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삶과 기억의 장소로서가 아니라 자산 증식의 방법으로서 주택을 인식하게 된 것 자체가 지독한 사회 문제 중에 한 부분이겠지만, 그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이런 세상에서 나만 못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

 

다만 모두가 조금 더 느긋해질 수는 없는 것인지 아쉬움이 들 때가 있다. 시장이 요동치며 나만의 세계가 박살나며 드러난 현실과의 괴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세워 놓은 높은 이상은 현실의 사람들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부동산 하락세에도 이전 호가를 유지하며 남 탓만 하고 있는다고 원하는 가격에 팔리는 것이 아니 듯이, 비싼 동네여야지만 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살기 좋아야지 세월을 흘리면서 장소로서의 그 가치를 서서히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희열감에 도취된 일부 사람들은 '모든 곳이 살기 좋아지는 비극을 바라지는 않을 테지만', 

 

어차피 그런 일을 영원히 발생하지 않을 테니 조금은 더 유한 마음으로 도시가 전반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간이라는 자산을 투자하지 않고 성숙해질 수는 없는 것이니, 너무 서둘러서 맛보려고 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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